[EP.436]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EDGE 6기 유영준)

유영준
2026-05-03
조회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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倉廩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창름실즉지례절 의식족즉지영욕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

— 『관자(管子)』 「목민(牧民)」편


요즘 조직문화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컨설팅을 하며 질문을 받으면 매번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심리적 안전감, 자율성, 몰입, 임파워먼트, 그리고 가치(value). 회사의 미션과 비전을 벽에 붙이고 핵심가치를 카드로 만들고 워크숍을 열어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묘하게 그렇게 정성껏 다듬은 가치가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회사들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창고가 비었기 때문이다. 연봉이 시장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데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야근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데 "헌신"을 외치며 휴가 쓰면 눈치가 보이는데 "워라밸"을 비전으로 내건다. 가치는 카드에 적혀 있으나 사람의 몸은 카드를 읽지 않는다. 몸은 통장 잔고와 점심값과 퇴근 시간을 읽는다. 이 진실을 2,700년 전에 이미 못 박은 책이 있다. 『관자(管子)』다.

관중(管仲, ?∼기원전 645)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이다. 친구 포숙아의 추천으로 제 환공(齊 桓公)을 섬겼고 제나라를 춘추 5패의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서 그의 정치를 이렇게 요약했다.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 관중은 도덕을 부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의 순서를 정확히 본 사람이다. 도덕은 풍요 위에서 자란다. 굶주린 사람에게 청렴을 요구하면 위선이 되고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충성을 요구하면 강요가 된다. 먼저 먹이고 그다음에 가르쳐야 한다. 이 단순한 통찰이 동양 정치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훗날 맹자가 말한 항산항심도 바로 관중의 이 말과 결이 닿는다. 다만 『관자』는 관중이 직접 쓴 책은 아니다. 학계는 대체로 전국시대 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에 걸쳐 관중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가 편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책의 첫 편 「목민」은 관중 본인의 사상을 가장 충실히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첫 장이 국송(國頌), 곧 나라 다스림의 총론이다.

「목민」의 '목(牧)'은 가축을 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양치기는 양을 막대로 때려서 몰지 않는다. 풀이 좋은 곳으로 데려가고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위험하고 추운 밤에는 우리에 들인다. 양이 살이 오르고 털이 윤이 나는 것은 양치기가 양을 기르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약용이 19세기 초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쓸 때 이 글자를 빌려온 이유도 같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르는 일이라는 선언이다. 조직도 그렇다. 리더십을 '관리(管理)'로 보는 사람과 '양육(養育)'으로 보는 사람의 결과물은 다르다. 관리는 통제하고 양육은 기른다. 관리는 행동을 강제하고 양육은 환경을 조성한다. 관리는 비용으로 보고 양육은 투자로 본다. 『관자』가 던지는 첫 질문은 그래서 이것이다. 당신은 조직 구성원을 '관리'하고 있는가, '양육'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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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 「목민」편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무릇 영지를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그 임무가 사계절을 살피는 데 있고 그 직분은 창고가 가득 차도록 하는 데 있다(凡有地牧民者 務在四時 守在倉廩)." 리더의 첫 번째 임무가 다름아닌 창고를 채우는 것이다.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보다 2,500년 앞선 통찰이다. 매슬로우는 1943년 논문에서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상위 욕구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관중은 기원전 7세기에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했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멀리 있는 사람도 오게 된다(國多財 則遠者來)." 이것이 동양 최초의 인재 유치 원리다. 국가가 내세우는 비전이나 이데올로기 따위가 좋아서 사람이 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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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가 개간되고(地辟擧) 곡식이 쌓이고(倉廩實) 백성이 머물 수 있는(民留處) 환경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멀리 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현대로 치환해보면 이런 개념이다. 연봉이 경쟁력 있고 일하는 환경이 정비되어 있고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회사에 외부의 인재가 모인다. 비전이나 컬처는 그 다음 문제다. 창고가 빈 채로 비전만 외치는 회사는 환공이 곳간을 비워둔 채 패자(覇者)를 꿈꾸는 것과 같다. 관중이 보았다면 단호하게 잘랐을 것이다. 순서가 틀렸다고 말이다.

여기서 멈추면 『관자』는 그저 부국강병에 집착하는 흔해빠진 물질주의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관중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목민」편의 두 번째 장이 바로 그 유명한 사유(四維)다. "나라에는 네 개의 벼리가 있다. 하나가 끊어지면 기울고, 둘이 끊어지면 위태롭고, 셋이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넷이 끊어지면 멸망한다. 기운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위태로운 것은 안정시킬 수 있고, 뒤집어진 것은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멸망한 것은 다시 세울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러 사유라 하는 걸까. 

첫째는 예(禮), 둘째는 의(義), 셋째는 염(廉), 넷째는 치(恥)다." 우리가 흔히 쓰는 '파렴치(破廉恥)'라는 말의 출처가 여기다. 청렴(廉)과 부끄러움(恥)이 깨진(破) 상태. 관중이 보기에 이는 나라의 두 벼리가 끊어진 것이며 이미 위태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순서다. 관중은 도덕(四維)을 먼저 외치지 않았다. 먼저 창고(倉廩)를 채운다고 말했고 그다음에 도덕이 비로소 작동한다고 말했다. 

가치는 풍요의 토양 위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급여와 복지가 시장 수준 이상으로 자리잡힌 회사에서 비로소 핵심가치가 의미를 갖는다. 보상이 부실한 채로 충성을 요구하면 그 충성은 가짜가 된다. 가짜 충성은 가짜 성과를 낳고 가짜 성과는 가짜 평가를 낳는다. 짜고치는 고스톱 위에서 그저 '좋아보이기만 하는 조직문화'가 회사를 덮는다. 결국 회사 전체가 위선의 회로에 갇힌다. 관중은 이 위선의 함정을 2,700년 전에 경고했다.c936ad9ec6852.png

관중이 제시한 네 벼리를 현대 조직 운영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첫번째, 예(禮)는 절도를 넘지 않는 일(禮不踰節)이다. 정해진 규칙과 프로세스를 지키는 것. 회의 시간을 지키고 의사결정 단계를 건너뛰지 않으며 권한의 경계를 존중하는 행위다. 절차적 정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의(義)는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일(義不自進)이다.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고 줄을 잘못 서지 않는 것. 능력 있는 사람이 자기 자리를 넘어서 권력을 탐하면 조직이 흔들린다. 직무 경계와 역할 책임의 윤리다. 

세번쨰, 염(廉)은 악을 가리지 않는 일(廉不蔽惡)이다. 잘못을 덮지 않는 것. 자기 잘못이든 동료의 잘못이든 은폐하지 않는 투명성이며 현대 조직에서 말하는 '말할 수 있는 문화(speak up culture)'의 동양 원형이다. 

네번째, 치(恥)는 굽은 것을 따르지 않는 일(恥不從枉)이다. 부당한 지시나 부정한 관행을 따르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이며 부끄러움을 아는 능력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의 마지노선이다. 이 넷이 함께 작동할 때 조직은 자정(自淨) 능력을 갖는다. 외부에서 누군가 감시하지 않아도 구성원 스스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한다.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내부 고발자가 매장당하는 구조'는 관중의 언어로 말하면 廉(악을 가리지 않음)과 恥(굽은 것을 따르지 않음)가 동시에 끊어진 상태다. 그야말로 파렴치한 조직이 되어버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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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의 진짜 가치는 창고와 벼리의 결합에 있다. 창고만 있고 사유四維가 없으면 부유하지만 천박한 조직이 된다. 보상은 있으나 자정 능력이 없는 회사. 단기 성과는 좋지만 사고가 터지면 한 번에 무너지는 회사.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가 목격한 여러 대기업·스타트업의 붕괴 사례 다수가 이 유형이다. 반대로 사유四維만 있고 창고가 없으면 가난하지만 결백한 조직이 된다. 윤리는 있으나 사람이 떠난다. 좋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결국 못 버티고 나가는 회사. 비영리·공공 영역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둘 다 갖춘 조직만이 오래간다. 이것이 관중이 환공을 패자(覇者)로 만든 비결이며 제나라가 춘추시대의 첫 패권국이 된 이유였다. 그는 먼저 염전을 개발하고 화폐를 정비하고 무역을 일으켰다. 곡식이 쌓이고 백성이 살 만해진 다음 비로소 예의염치를 강조했다. 

조직도 같다. 먼저 창고를 채워보자, 시장 경쟁력 있는 보상, 정비된 일하는 환경, 사람을 떠나지 않게 하는 시스템. 그 위에 예의와 염치라는벼리를 세워라. 절차의 존중, 역할의 분별, 투명성, 부끄러움을 아는 문화. 순서가 바뀌면 작동하지 않는다. 창고 없이 벼리만 외치는 조직은 위선이 되고 벼리 없이 창고만 채우는 조직은 천박해진다.

『관자』 「목민」편은 동양 정치사상의 출발선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한국에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서삼경을 읽고 한비자를 인용하고 손자병법을 외운다. 그러나 관중이 말한 가장 단순한 명제인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라는 말은 잊고 산다. 이 망각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조직문화는 오랫동안 창고는 비었어도 예절은 지키라는 압력 위에서 작동해왔다. 박봉의 충성, 야근의 헌신, 휴가 없는 주인의식. 모두 倉廩 없이 四維만 요구한 결과다. 관중이 보았다면 단번에 순서가 틀렸는데 어떻게 일을 진행할 수 있냐며 화를 내며 진단했을 것이다.


좋은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통장을 보라. 그리고 점심값과 퇴근 시간을 보라. 벽에 붙은 이쁜 카드에 적힌 핵심가치는 그 다음 문제다. 

창고가 차야 예절이 산다. 이것이 2,700년의 시간이 검증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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